중국여행

베가본드와 함께 걷는 술길따라 물길따라 EP1.

베가본드 2025. 3. 5. 20:18

 

큰제목 : 술길따라 물길따라

소제목 : 베가본드와 함께하는 중국술이야기

EP1. 알고 마시면 더욱 즐겁다. 중국주(中国酒)란 무엇인가?

  1. 술의 역사

인류가 술을 언제부터 마셨는지는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지만, 인류의 문명과 술의 역사는 뗄 수 없는 관계임이 분명합니다.

사람이 마시는 거의 대부분의 술은 먹는 곡식이나 과일등의 열매를 발효시켜 만듭니다..

막걸리나 포도주,맥주등과 같이 곡식이나 과일을 발효시키고 찌거기를 걸러내어 마시는 발효주 제조의 흔적은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석기 시대인 BC7000년전, 그러니까 지금으로 부터 9000여년 전에도 술을 만들어 마신 흔적이 발견되고 있으니 그야 말로 인류의 문명의 시작은 술과 함께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것입니다.

수천년 동안 발효된 원액을 그대로 마시거나 물에 타서 마시는 방법으로 술을 마셔왔던 인류에게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랍지역에서 시작된 증류 기술의 발전 입니다.

바닷물을 끓이고 증발시켜 소금이나 식수를 만드는데 사용했던 원시의 증류법이 획기적인 발전을 하여 현재와 같은 증류기술이 된것은 8세기경 이슬람의 학자들의 실험 결과 입니다.

처음부터 술을 얻고자 했던것이 아니라 연금술등의 영향으로 순수한 물질을 얻기 위한 여러 실험끝에 끓는점이 낮은 와인이나 맥주등을 끓여보니 물보다 낮은 온도에서 끓어 증발하는 기체가 냉각되어 물이 아닌 다른 성질의 액체가 생기는데 이를 al Kulhul (알쿠울) 이라 불렀고 이 기술이 발전을 하여 현재와 같은 에틸알콜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아랍지역에서 만들어진 증류기술이 세계로 널리 퍼지게된것은 11-3세기에 일어난 두차례의 큰 전쟁때문입니다.

십자군 전쟁(서기1096~1291년)은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으로 부터 탈환한다는 명분하에 약 200여년간 자행했던 이슬람지역으로의 원정 전쟁으로 아랍지역에서 놀랍게 발전한 화학,물리,수학,의학,건축등의 과학기술이 유럽으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 유럽으로 전래된 증류기술로 포도주로는 코냑등의 브랜디를 만들게 되었고 맥주에서는 위스키라는 증류주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서양과 아랍문명의 충돌과 교류가 십자군 전쟁으로 폭발적으로 이루어 졌다면 동양과 아랍문명의 폭발적교류는 몽골제국의 세계 정복 전쟁의 결과 입니다.

십자군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인 1200년경, 13세기부터 약 150여년간 동양을 평정하고 서쪽으로 달려가 러시아와 헝가리를 복속시켰으며 남쪽으로는 인도까지 정복을 하였으나 페르시아와 아랍 지역은 정복하지 못한 몽골제국은 칭기스칸의 사후 칭기스칸의 자손들에 의하여 여러 칸국으로 분열 되다가 손자인 쿠빌라이 칸이 중국의 남송을 멸망시키고 1271년 원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이 즈음 만들어진 인도의 제국이 무굴제국입니다. 무굴(Mugul)의 원어가 몽골입니다.

2.중국주의 역사[中国酒历史]

한나라 이전부터 곡식을 발효하여 만든 발효주를 마셨던 중국대륙의 술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증류 방법이 전해지고 나서 입니다.

 

세계정복전쟁으로 동양의 입장에서는 세계의 끝인 유럽의 적지않은 지역을복속시킨 몽골제국은 눈부신 문명을 이루고 있던 페르시아와 아랍 지역과 크고 작은 분쟁을 이르키면서도 교류를 멈추지 않았던 결과 이슬람 지역의 발전된 많은 문물을 동양으로 가져오게 됩니다.

서양으로 가고 있었던 증류의 기술이 이 때 중국으로도 전해지게 되어 중국의 술은 또 한번의 대 도약하며 발전을 하게 됩니다.

중국의 증류주(蒸馏酒)는 쿠빌라이 칸의 원나라에서 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이 전까지의 중국술은 사람이 먹고 남은 곡식이나 과일을 발효하여 걸러서 마시는 알콜 도수 약3도에서 4도 정도인 발효주였습니다.

삼국지의 장비나 수호지의 영웅호걸들이 밤새 독아지째 술을 마셨다는 기록은 바로 이러한 저도수(低度数)의 발효주(发酵酒) 였기때문에 가능한 일 이었습니다.

효모에 의해 발효된 저도수 발효주의 저도수 알콜은 시간이 지나면 초산균에 의하여 발효가 계속 진행되어 알콜 성분이 분해되어 초(醋) 가 되어 버립니다.

사람이 먹는 자연산 식초는 술이 만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식초가 되는것입니다.

자연상태의 발효주는 오래 보관 할 수 없으며 일관성 있는 맛을 유지 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자연 발효 상태에서는 최고로 생성할 수 있는 알콜 도수는 약 14도 정도가 최고 입니다. 이 이상의 도수로 발효가 되면 곡식을 알콜로 변환시키는 효모균이 사멸하게 되어 더 이상 알콜 발효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발효주를 증류하게 되면 높은 도수의 술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이를 오랫동안 보관 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높은 도수의 알콜은 마시는 용도 이외에도 의약품등의 여러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몽골의 원나라에서 전해진 증류 기술은 명나라와 청나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대로 정립되고 발전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략의 영향으로 몽골군의 주둔지인 개성,제주,안동등을 중심등으로 증류주 제조 기술중 하나인 끓여서 만드는 술이라는 의미의 소주(燒酒)가 전해지게 되었으며 안동소주 등이 그 영향으로 만들어진 술입니다.

3.중국주의 발전 과 현대 중국주의 중요한 변곡점

현재의 중국주(中国酒)는 증류주가 대표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중국의 술문화와 시장은 증류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독보적입니다.

사천성과 섬서성등의 황하 유역의 비옥한 토지에서 산출되는 곡식이 많고 유통이 활발한 지역을 중심으로 술의 생산과 유통이 발전을 하는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광활한 대륙답게 지역별로 생산되는 곡식의 종류가 다를 뿐 아니라 같은 곡식이라도 수확하는 시기와 품질이 다르기 때문에 술을 만드는 방법과 기술역시 통일된 방법으로 만들어 내기에는 불가능 합니다.

더우기 곡물 많이 사용하고 만드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며 증류하는 비용 또한 적지 않게 필요하기 때문에 증류주는 일반 백성들이 손쉽게 즐겨 마시는 술이 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중국 증류주에 변곡점이 되는 두가지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첫번째.1915년 샌프란시스코 국제 박람회(일명:파나마 박람회)

청나라는 무너지고 손문의 중화민국이 성립되었지만 국제적으로 큰 위상을 떨지치 못하며 내전에 휩싸여 있던 시대인 1915년에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중남미의 파나마 운하가 개통합니다. 이를 기념하는 만국박람회가 미국 샌프란 시스코에서 열리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1914년 월 일)이 발발한지 얼마되지 않은 때라 신생국으로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던 중화민국도 적극적으로 국제무대에 참여하고자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박람회에 참여를 하게 됩니다.

만국박람회에 참여할 마땅한 공산품이 없어 농산품과 함께 중국 각지역의 증류주를 중심으로 대거 출품하였으나 마땅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던차에 누군가가 술항아리를 깨트렸는데 그 향기에 매혹된 많은 사람들이 중국주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종국에는 금상(金章)을 수상했다 라고 하는것이 마오타이를 비롯한 로주노교,분주등의 많은 유명 중국 백주회사가 이야기 하고 있는 스토리(故事) 입니다.

두번째. 1935년 3월 사도적수의 마오타이

 

1917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러시아가 무너지고 막스.레닌이즘으로 무장된 공산주의가 세상에 광풍처럼 밀려 닥칠때 1921년 중화민국에서도 공산당이 만들어지고 중화민국은 기존의 군벌과의 내전과 다른 공산당의 홍군과의 국.공 내전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의 지원을 받는 중화민국의 국민당 정부는 대대적으로 공산당의 홍군을 토벌하게 되었고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당의 홍군(红军)은 국민당군을 피하여 중국 대륙을 걸어서 후퇴하는 일명 대장정(大长征)을 나서게 됩니다.

대장정의 후퇴를 하면서도 내부의 분란과 분열을 끝내지 못했던 홍군은 귀주성의 준이(遵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오쩌둥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하게 되었고 마오쩌둥의 주도하에 귀주성을 지나고 사천성을 넘어 운남과 섬서에 이르르는 대장정을 하게 됩니다.

1935년. 준이에서의 결의(遵义结义)후 결집한 홍군을 토벌하고자 국민당 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고 마오쩌둥의 홍군은 마오타이(茅台)지역을 중심으로 흐르는 적수하(赤水河)를 네번을 건너는 일명 사도적수(四渡赤水)의 전술을 펼친 끝에 어렵사리 국민당군 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현대 신중국 의 성립에 중요한 역사적 사건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오타이지역 뿐 아니라 중국 공산당사나 신중국의 역사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사도적수(四渡赤水)의 전쟁중에 지치고 다친 홍군이 세번째 도강지역인(三渡) 마오타이진에 도착 했을때 마오타이의 농민과 술공장의 노동자들이 마오타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높은 도수의 술을 내어 한편으로는 상처를 치료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마시며 마음을 다독였다는 내용이 중요한 사실로 기록 되고 있습니다.

이후 1949년 10월1일 신중국이 성립되고 마오타이 지역을 잊지 못한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들이 마오타이의 유명한 술공장 몇곳을 국유화 하며 통일된 술맛을 유지하게 만들며 생산하는 것이 지금의 국주 마오타이(国酒茅台) 입니다.

 

중국 선전에서 베가본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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